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라쿠스 형제 (문단 편집) == 가이우스 그라쿠스 ==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으로 그보다 9살 연하였다.[* 그가 죽은 뒤 14년이 지나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가이우스 마리우스보다 3살 연하이다.] 티베리우스가 죽었을 때 그는 21살이었는데 형의 죽음은 그라쿠스에게 아주 큰 슬픔을 안겨주었으며 이런 강한 충격이 그의 형에 비해 더 급진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을 갖게 하였을 거라고 플루타르코스는 서술하였다.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의 작성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티베리우스가 농지 분배 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그의 장인과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여기에 참여시킨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농지법에 대한 방해 공작으로 고생했을 때나 살해당했을때 가이우스는 이것을 아주 직접적으로 체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때 그는 이미 성인이었던 21세였으므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지[* 즉 원로원 의원들의 부패와 횡포와 이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라는 것.]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죽음 이후 그는 가급적 조용히 튀지 않고 명예로운 경력을 밟아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연설할 기회가 생겼을 때 흥분을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언사를 내뱉었는데 이것이 실은 그의 본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로마에서 가장 훌륭한 시민인 티베리우스를 죽인 악당들이여! 두고 보시오. 내가 반드시 그대로 갚아주겠소!''' 다만 그 이후로는 이렇다할 실언을 한 기록은 없으나, 그를 주목하는 이들이 절대 그냥 놓치지는 않았을 워딩이었다. 이후로는 28세에 콰이스토르(=로마인 이야기식 번역으로는 회계감사관. 각종 서적에서는 재무관)에 선출되었고 임기가 종료된 32세에 호민관 선거에 나서 당선된다.[* 굳이 따지자면 호민관은 명예로운 경력/관직의 사다리에 들지 않는다.] 가이우스는 호민관이 되자마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마찬가지로, 원로원의 친구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선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 그의 동료들을 처형한 당시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공격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당시 로마법엔 사형선고할 수 있는 재판은 반드시 민회[* 그중에서도 이 당시에는 사실상 형식적인 존재로만 남은 코미티아 쿠리아타를 빼면 제일 유서 깊은 민회이자 귀족, 평민 가리지 않고 모든 로마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민회인 코미티아 켄투리아타.]로만 가능했는데 포필리우스는 이를 어기고 특별위원회를 연 후 거기서 재판을 통해 그들을 처형시킨 바 있다. 가이우스는 민회를 통하지 않은 사형 판결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 법안은 소급 적용이 되었던 고로 포필리우스는 로마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그리고 뒤이어 티베리우스의 공약이었던 배심원을 기사계급으로 채우는 정책을 실현시킨다. 가이우스는 농지법도 적극적으로 실현하려 하였다.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에게 대단히 적대적이었던 것은 티베리우스가 추진했었던 125 헥타르의 제한이 원로원의 토지 소유와 충돌했었기 때문인데 가이우스는 이를 피하려고 해외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이것을 로마 시민들에게 배분하려 하였다. 이 점은 원로원의 재산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고 또한 원로원이 이미 평민들에게 농지법을 약속한 것도 있어 가이우스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에 그는 형보다 광범위한 개혁을 계획하고, 농지법 외에도 몇 가지 정책을 더 추진한다. 첫번째는 곡물법(lex Frumentaria)이다. 이 법은 국가가 해외에서 곡물을 수입하여 로마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 매월 일정량을 1모디우스(modius) 당 6.5아스(ass)에[* 한 부셸의 약 1/4쯤 되는 곡물에 비숙련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절반쯤 되는 가격] 공급하도록 규정했다. 흔히 곡물법을 '곡물을 싸게 공급하는 것' 정도로 알려져있지만 실상은 더 복잡하다. 이 가격 자체는 당대 로마의 평균적인 시장 가격보다 그리 낮지는 않았고, 오히려 시기에 따라서는 시장 가격보다 높은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곡물법의 진정한 의의는 곡물가의 안정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이우스의 두번째 정책은 시민권이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라틴인들에게 확대 부여하고, 라틴인들의 권리를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 주민에게 주는 것을 골자로 시민권 개혁을 시도한다. 하지만 곡식에 대한 법은 통과되었음에도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은 기각되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다른 이탈리아인과 공유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정책으로, 티베리우스의 원안에는 있었으나 어느새 삭제된 '농지 분배 위원회의 사법권'을 부활시켰으며, 네 번째 정책으로 대규모 도로 건설 사업으로 고용률을 올렸다. 다섯 번째로 그는 군대법(lex Militaris)으로 정부가 병사들의 급료를 줄이지 않고 의복과 장비를 지급하고, 군복무 기간을 단축하고, 17살 미만 소년들의 징집을 금지하도록 했다. 이는 군대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병사들과 동맹국 주민들과 유권자들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여섯 번째로 그는 로마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식민시 건설을 추진했으며, 선정된 지역은 카푸아, 타렌툼, 카르타고였다. 특히 카르타고 지역에 건설된 식민시인 유노니아는 가이우스의 각별한 관심을 받은 곳이였는데, 로마 및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에서 데려온 6천 명의 개척자들을 125에이커의 농지에 정착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가이우스는 유노니아 개척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직접 건너갈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세금 징수를 개혁하였다. 가이우스는 형과 달리 연임에도 성공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원로원이 반발하며 움직이기 시작해 이들은 같은 원로원인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에게 힘을 실어준다. 원로원에게 조종당한 드루수스는 가이우스보다 더 급진적인 법안을 내놓았다.[* 사실 이는 완전히 인기 영합주의적인 법안으로 원로원과 드루수스는 이 법안을 계속 유지하고자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가이우스의 인기를 갉아먹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시민들의 인기는 드루수스에게 집중되고 가이우스는 잊히게 되었고 결국 세번째 호민관 선거에 출마하나 여기서 낙선한다. 그해 가이우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던 루키우스 오피미우스가 집정관에 당선된다. 오피미우스는 가이우스의 법안을 철회하려고 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들이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모이게 된다. 이때 오피미우스의 부하가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를 빌미로 삼아 원로원은 최초로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의한다. 이로써 이들은 로마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초월적인 권한을 오피미우스에게 주었으며 오피미우스는 그의 병사를 이끌고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를 모두 체포한다. 가이우스는 달아나다 목숨을 끊었으며 그의 지지자 3천 명은 모두 처형당한다. 그렇게 한 뒤 원로원은 가이우스의 모든 법안을 폐기한다. 하지만 가이우스를 제거한 오피미우스도 나시카처럼 뒤끝이 좋지는 않았는데, [[누미디아]]와 한판 붙은 유구르타 전쟁 직전에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것이 들통나 공직에서 파면되고 디라키움으로 추방되는 형벌을 받아 거기서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